저 멀리 까마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건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는 세상 속에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질주하여도 결국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이상의 시 <오감도>는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까마귀가 되어보려 한다. 아주 높이 날진 않더라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조망함으로써 보이는 것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비극을 찾아내고 싶다.
사는 것은 전쟁이다; 전쟁같은 현실을 동화적 표현으로
그간 내가 겪었던 슬픈 기억과 트라우마는 충분히 내 작업의 모티브가 되어줬다.
개인적인 슬픈 경험과 사소한 것에 예민하고 심각해지는 성격은 나를 더욱 내 안의
깊은 골짜기로 인도하였고, 나는 스스로 무기력한 약자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사회적 약자와 동화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면서 ‘비극’은
작업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비극적 상황의 적절한 표현으로 전쟁을 택하게 되었고, 여기에
아름다운 전쟁이라는 극과 극의 반어법을 선택함으로써 감정의 극대효과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아름답고, 평화롭게, 마치 동화처럼 포장된 풍경 속에는 철저히 가해자
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가 있으며, 나는 그 관계를 새의 시각으로 멀리서 관조함
으로써 약자의 비극적 현장을 부각시킨다. 그러기 위해 방법적으로 일상의 사건,
사고, 사회이슈의 사실적 이미지와 나의 기억들을 간추려 놓고 여기에 상상을
가미하여 동화적 현실로 바꿔놓음으로써 관조된 비극의 현장은 재탄생되는 것이다.
거대하고 화려한 세상 속에 가려진 상처와 아픔은 간과할 수 없는 시대의 진정한
초상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약자의 비극에 주목하는 이유이며, 약육
강식의 법칙이 자연의 순리로 당연히 받아들이기 이전에 나는, 비록 관조하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고통 받고 소외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작업에서 강자와 약자의 관계, 즉 비극적 스토리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예컨대 전투기, 미사일, 총, 독수리, 검은 기름띠, 물고기 떼 등의
소재는 현실에서의 강자를 상징하고 이에 반해 나체의 여주인공, 강아지, 천사,
인어, 시체, 북극 곰, 바다표범 등은 현실에서의 약자를 상징한다. 이들 소재는
화면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며, 은유와 상징의
장치를 통해 마치 초현실의 또 다른 현실로 인도하는 역할이 되기도 한다.
아름답지만 그것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이중적인 모순이 지속되는 한, 나는
세상을 관조할 것이며-그것이 무기력한 방법일지라도- 힘없는 자에 대한 사회의
잔인성과 인간의 폭력성, 그로인해 현대 사회에서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작업에
표현하고자 한다.
주된 표현기법은 한지꼴라쥬 위에 채색을 하는 방법이다. 한지를 먹과 색으로
얼룩덜룩하게 물들이는 과정을 시작으로, 다 마른 후 화면 위에 꼴라쥬하고 그
위에 다시 색을 켜켜이 올림으로써 한지와 한지의 경계면을 부드럽게 연결시키고
통일감을 형성하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은 우연적 무늬와 독특한 색감을 형성케
하는 한지 염색기법과 채색화가 조화롭게 어울러져야만 가능한 것이며, 이 위에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그려내는 작업이 들어가면서 작품이 완성된다. 이 외에도
평면작업과 프라모델 설치 작업의 조합이나 평면작업과 조명을 이용한 그림자
작업, 미완성된 평면 작업 위에 flash 동영상을 쏘아 작품을 완성하는 등 유기적인
매체 조합을 시도하고 있다.